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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의 큰 사찰 봉선사 편액은 왜 한자가 아닌 한글일까? 봉선사에 가면 꼭 기억해야 할 것. 운허스님과 한글

길 위 2022. 2. 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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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다 보면 사진을 찍던 순간에 전혀 알지 못했던 내용들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2년 전인가 경기도 남양주 진접읍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인 봉선사가 그랬습니다. 분명 봉선사의 가장 중앙에 위치한 '대웅전'을 찍었더랬는데 사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대웅전의 편액에는 한자로 '대웅전'이라는 표시 대신에 또박또박 새겨진 한글로 된 '큰법당' 이라는 편액이 있다는 것을요.

내가 생각하는 봉선사는 그저 편하게 오고 갔던 곳.
그 숱한 시간을 봉선사와 함께 하고도 나의 무심함과 무지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평소 봉선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봉선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다녔던 것일까?

경기도에서 제법 큰 사찰이다.
다른 사찰과는 달리 지금도 주차장 사용료와 사찰 입장료를 받지 않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마음에 평정이 필요하거나 위로를 받고 싶을 때 찾는 사찰 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중단되었지만 예전에는 점심시간에 가는 사람들에게는 '비빔밥'을 준다고 했다.
풍경소리가 아름다운 곳이다.
어느 날 드는 의문 '왜' 한글 편액이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의 봉선사의 대웅전 편액은 '큰법당'으로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2년전 사진)

봉선사에 오면 꼭 기억해야 할 2가지 운허 스님과 한글.



1. 봉선사의 일주문(一住門)의 한글 편액은 왜 2가지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가?
봉선사의 일주문 편액한자로 된 가로 쓰기가 아니라 한글로 된 세로 쓰기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찰처럼 '일주문'이라는 글자 대신 봉선사는 두줄 세로 쓰기로 '운악산&봉선사'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들죠. 왜 사찰 이름이 2개인가? 하는 것.
봉선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으로 고려 광종 때인 969년 법인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압니다. 창건 당시에 이름이 운악사(雲岳寺)입니다. 한문의 의미를 풀자면 [구름과 큰 산이 있는 절]이라는 뜻입니다. 운악사는 조선시대 세종 때 이 절을 폐지했으나 예종 1469년 다시 중창했습니다. 세조의 비였던 정희왕후 윤씨가 이 사찰 주변에 있는 광릉을 보호하고 세조를 추모하기 위해 절을 중창한 것이고 이때 원래의 운악산 이름에서 지금의 봉선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봉선사는 선왕 세조를 잘 받들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봉선사도 전쟁을 피하지는 못했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그럴 때마다 중창과 중수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6.25 전쟁에는 1951년 봉선사의 모든 건물이 다 소실되고 말았죠.
봉선사의 부활은 단계적으로 진행됩니다. 1959년 범종각을 세우고, 1963년에 운하당을 세웁니다. 1970년
주지스님이었던 운허 스님(1892~1980) 이 사찰의 대웅전을 중건합니다. 운허 스님은 일제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했었습니다. 광복된 이후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집중합니다.

운허 스님이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 것은,
쉬운 한글 경전을 표기해 모든 사람들이 쉽게 불경을 접할 수 있게 하는 뜻이랍니다.

오늘 다시 찾은 남양주시 봉선사의 일주문으로 한글로 세로쓰기 표기 된 ' 운악산 봉선사' 편액의 모습.

2. 운허 스님의 불경 한글화의 취지를 살린 대웅전의 한글 표기 '큰 법당'이라는 이름
우리나라 사찰의 법당 가운데 한글 편액으로 되어 있는 사찰은 남양주시의 봉선사가 유일합니다. 그 당시에 매우 놀라운 파격. 서프라이즈였겠죠. '큰법당' 글씨체는 단정하고 원만합니다. 결코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 편액의 글씨는 누가 쓴 것일까요? 그것은 서예가 '금인석'이라는 분의 글씨이고, 큰 법당 주련의 글씨는 석주스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내용은 "이 절을 처음 지어/ 기울면 바로잡고/ 불타서 다시 지은/ 고마우신 공덕이다."라는 내용.
아쉽게도 사진이 없네요.



길 위의 사진관
촬영일 2022. 2.14. (월)

오늘 다시 찍어보는 봉선사의 대웅전의 편액. '큰법당' 한글 표기. 서예가 금인석의 글씨.

사진에 보이는 것은 큰법당 편액과 아래 기둥의 주련입니다.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 못 하고/
라는 한글 표기의 4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3. 유일한 콘크리트 건축 사찰
봉선사 큰 법당은 나무로 지어진 사찰이 아닙니다. 보기에는 나무로 된 다른 사찰과 다름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오늘 다시 방문하여 사실일까? 하는 의구심으로 벽면이나 위의 처마들을 다시 보았습니다. 이 사찰은 콘크리트 건물 위에 전통 목조양식을 재현한 가장 완성도가 높고 어디에도 없는 건축방식을 실행하였습니다. 큰 법당 건물은 현재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죠.
단단한 콘크리트를 마치 목조 건축물처럼 보이게 탈바꿈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동안의 수많은 소실과 다시 재건을 한 경험이 아닐까요? 오래오래 법당을 소실시키지 않고 계속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4. 예종 1년(1469년) 봉선사를 세울 때 조성된 동종.
동종은 봉선사를 세울 때 제일 먼저 세운 것입니다. 동종의 몸체 한복판에는 글씨가 있는데 '모든 죄가 소명하고 공덕이 생겨난다는 의미를 지닌 [옴마니 반메 훔]'이라는 6자를 양각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보물 제397호. 높이 238m, 입지름 168m

사람들이 이 동종 아래 많은 동전들을 던져놓았더군요. 지금은 이런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운허스님과 인연이 있는 춘원이광수기념비

5. 운허 스님과 춘원 이광수와의 인연
운허 스님과 춘원 이광수는 6 촌간입니다. 이광수가 친일 변절자의 '오명'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던 광복 직후, 운허 스님은 잠시 봉선사에 묵을 곳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법화경을 통해 이광수를 불교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춘원 이광수는 6.25 전쟁 때 서울 자택에 갔다가 북한군에게 납치되고 그 뒤로 소식을 모르는 터에 1975년 주요한 선생을 비롯 동지들이 그와 연고가 깊은 봉선사에다 기념비를 세우면 좋겠다고 제의하여, 운허 스님의 허락 아래 그의 기념비가 봉선사에 생기게 된 것이죠. 춘원 이광수의 시의 구절이 비의 옆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춘원 이광수는 북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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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봉선사 우물가의 독특한 '석조 관음보살상'
봉선사 한쪽 우물가에는 독특한 생김새의 '석조관음보살상'이 있습니다. 원로 조각가 '최종태'분이 2017년 제작한 석조 보살상입니다. '최종태' 특유의 편안하고 단정한 조각입니다. 원래 그분은 원래 카톨릭 신자이고 현대조각을 전공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의 손에 의해 전통 불교 사찰의 봉선사에 카톨릭신자 조각가의 보살상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런 느낌의 보살상은 2000년 서울 '길상사'에도 있는데요. 길상사의 관음상도 '최종태'조각가가 제작한 것이라 합니다. 봉선사의 법정 스님이 1960년대 운허 스님과 함께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영향을 받았으니 이 길상사의 관음상을 보고도 신선한 충격을 받으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지금의 봉선사의 '석조관음보살상'입니다.

카톨릭과 불교의 융합이 이루어낸 '석조관음보살상'

7. 지금도 계속되는 봉선사의 파격과 실험과 융합의 조화.
봉선사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예상치 못한 파격과 실험과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죠. 한자와 한글 대웅전과 큰법당/ 철근 콘크리트 건축과 전통 목조건축의 만남/ 괘불과 종이/ 불교와 카톨릭의 융합..
모든 것이 일부 계층의 종교가 아닌 모두의 불교를 지향하기 때문이죠. 20세기 한국 불교의 '운허 스님의 뜻' 이기도 하죠. 그래서 지금 우리가 방문하는 봉선사는 편안함과 쉽게 접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볼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은 봉선사. 진정한 봉선사의 의미를 알게 되니 요즘같이 차별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 의미가 새롭습니다. 올림픽 이념이 점점 퇴색되어가는 화합과 공정함.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해 접종을 한 자와 안 한자로 나뉘는 사회적 차별 구도. 그리고 부를 많이 가진 자와 부를 가지지 못한 자로 나뉘는 지금의 현실에서 말입니다.

그래도 오늘 진정한 봉선사의 의미를 알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앞으로는 봉선사를 좀 더 좋은 마음으로 방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봉선사의 끝도 없는 또 다른 볼거리들은 다음 티스토리에 남길게요~
오늘 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봉선사의 500년 된 느티나무와 스님.

500년 된 느티나무가 봉선사의 깊은 세월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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